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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지낚시의 역사
견지낚시 고증자료
 
 
작성일 : 2012-11-14 16:03:54
허미수의 견지낚시
 글쓴이 : 관리자 (관리자)
조회 : 1,943  
견지낚시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을 찾았다는 반가운 기사가 나왔다(월간낚시, 2004년 1월호, 장창락 기자). 조선 중기의 학자인 미수 허목의 시문을 서동찬(한국문화재신문 편집국장)가 고찰한 글이다.
허목(許穆, 1595~1682)은 조선 선조~현종 시대를 살았던 정치가이며 학자로, 미수(眉叟)는 그의 호이다. 미수는 만년에 연천군에 살며 임진강에서 낚시를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은 서동찬씨가 미수의 낚시를 고찰한 것의 요약이다.

허목의 견지낚시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웅연범주시영숙(熊淵泛舟示永叔)’이란 시이다. 웅연(熊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말로 곰소를 뜻한다. 그곳에 배를 띄우고 낚시를 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이 웅연을 괴미소라고 부르고 있다. 본래 곰소이던 것이‘고미소’가 되었다가, 고미소가 이모음 역행동화를 일으켜 괴미소가 된 것이다.
시 제목은‘웅연에서 배를 띄워 영숙에게 보이다’는 의미이다. 괴미소에서 뱃놀이 겸 낚시를 하고 그의 애제자인 영숙(永叔)에게 보였다는 것이다.
<웅연범주시영숙(熊淵泛舟示永叔)>
산 밑 봄강은 물이 깊고 물 흐름이 없어(山下春江深不流)
푸른 물풀에 바람 일자 물결 위에 꽃이 뜬다(綠蘋風動浪花浮)
풀은 푸르고 흰 모래밭 물가에 해 저물어(靑草沙白汀洲晩)
낚시채비 걷고 배를 저어 나루로 올라간다(捲釣移舟上頭)

첫 연에서 산하(山下)라고 하였으니 웅연 바로 옆의 절벽산을 이른 것이고, 봄강(春江)이라 하였으니 미수개미가 오르는 곡우 무렵이었을 것이다. 물풀이 바람에 파르르 움직이고 물결 위엔 벚꽃이며 살구꽃 꽃보라가 떨어졌을 것이다.
물이 깊어 흐름이 없다’(深不流)고 한 것은 웅연(괴미소)의 상황을 표현한 것. 흰 모래밭을 배경으로 푸른 풀이 강변에 다북쑥 핀 긴긴 봄날, 해 저물도록 낚시를 한 것이다. 허목은 마지막 연의 첫머리에서‘권조(捲釣)’라고 표현함으로써 견짓대 채비를 둘둘 감아 낚시를 거두었음을 전하고 있다.
그토록 많은 조선시대의 명현석학 낚시꾼들이 있었고, 그 숱한 낚시꾼들이 많은 낚시 시를 남겼건만 무슨 낚시를 했는지 구체적인 표현이 없더니 여기서 비로소 견지낚시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어 반갑기 그지 없는 일이다. 강물이 저대로 흐르다가 살짝 물 흐름이 죽는 웅덩이처럼 생긴 웅연(熊淵)에 견지 채비를 흘렸음이리라. 그곳에 모여 있는 고기떼를 노린 허목.‘소머리’를 노린 것을 보아도 보통 수준의 견지꾼이 아니었으리라.
강변의 푸른 풀밭 흰 모래밭, 긴 봄날의 낚시에서 원 없이 낚고 즐긴 하루를 마감하고 나루터를 찾아 배를 저어 강을 거슬러 올랐기에 ‘권조이주상도두(捲釣移舟上頭)’라고 그는 표현했다. 둘둘 말아 채비를 걷고 배를 저어 도두(頭 나루터)를 향해 강을 거슬러 오른 것이다. 다시 말해 나루터에서 강물 흐름에 배를 맡겨 하류로 내려가 낚시를 하다가 해 저물자 물살을 거슬러 나루터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상 서동찬씨의 고찰 결과를 다시 음미해 보자.
미수는 봄날 배를 타고 낚시를 간다. 배를 하류로 몰아가서 깊은 소에서 낚시를 하다가 저녁이 되어 물결을 거슬려 올라 나루로 돌아오는 상황이다. 그러나 시에서 똑 불어지게 낚시 조법을 나타낸 곳은 없다. 글자에 품은 뜻과 상황에 비추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서동찬씨는 첫 귀에서 ‘물이 깊어 흐름이 없다(深不流)고 한 것은 강물이 저대로 흐르다가 살짝 물 흐름이 죽는 웅덩이처럼 생긴 웅연(熊淵)에 견지 채비를 흘렸음이리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다르게 볼 수도 있다. 낚시를 한 곳이 ‘강물이 깊고 흐르지 않는’ 곳(江深不流)이라고 보면 대낚시를 할 가능성도 있다. 또 깊은 소에 고기는 많겠지만, 흐르는 물을 벗어나 견지를 한다는 것도 의아하다.
또 서동찬씨는 마지막 연의 첫머리에서 ‘권조(捲釣)’라고 표현을 ‘견짓대 채비를 둘둘 감아 낚시를 거두었음을 전하고 있다’고 보았다. 옛 시에서 낚시를 거두는 것은 파조(罷釣)라고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미수는 ‘낚시를 말고(捲釣)’라고 표현했다. 견지라면 가능한 표현이다. 그러나 옛 통대낚싯대는 대에다 줄을 둘둘 말아가지고 다녔다. 이 경우라도 권조란 표현이 가능하다.
또 중요한 포인트의 하나는 마지막 연 ‘낚시채비 걷고 배를 저어 나루로 올라간다(捲釣移舟上頭)’의 해석이다. 시에 미수가 배를 타고 하류의 소로 가서 낚시를 하였지만, 하루 종일 배를 타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배에 내렸는지에 대한 상황 설명은 없다. 만약 배를 내렸다면 당연히 대낚일 터이고, 종일 배를 타고 있었다면 대낚시과 견지낚시일 가능성이 반반이다.
마지막 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번역도 있다.
‘낚시 걷어 배 타고 나루터로 오르네(捲釣移舟上頭)’(민족문화문고간행회, 「미수기언II」, 226쪽, 1985.)
‘낚시 걷고 배돌려 나루로 왔네(捲釣移舟上頭)’(민족문화문고간행회, 「미수기언V」, 154쪽, 1985.)
같은 책에서도 역자가 다르니 이같이 맛이 달라진다. 또 서씨의 역을 포함한 세 가지 번역이 모두 상황이 약간씩 다르게 새겨진다. 이러한 점이 한시의 모호함이며, 매력이다. 나중 둘은 한문학을 한 낚시를 잘 모르는 사람의 번역인 듯싶다. 그러나 낚싯대를 어떻게 했는지, 또 배를 타고 있다 되돌렸는지, 아니면 뭍에 있다 배를 타고 돌아왔는지는 모두 확실하지 않다.
미수는 자신이 낚시를 즐겼다는 글을 남긴 몇 안 되는 옛 선비 중 한 분이다. 미수는 목우도기(牧牛圖記)에 ‘들판에서 소도 먹이고 시내에서 낚시질도 하다가(垂釣) 해가 저물어 노을이 지고 어둠이 깃들면 낚시를 걷어가지고(罷釣) 소를 몰고 돌아오는데 이것이 내가 밭 갈고 소먹이면서 즐기는 낙이다’는 표현이 있다. 그리고 목우도기에 나오는 낚시는 대낚(持釣竿)이다.
한자로 된 시는 상황을 정확히 묘사하기보다 문자에 안에 있는 뜻을 보는 글이다. 시라는 축약된 글에서 낚시 행위를 분석함은 역시 어려운 일이다. 다행히 미수가 낚시를 즐겼다는 연천군 징파강(澄波江)은 임진강 줄기로 남북이 분단되었지만 우리 땅으로 남아있다. 꼭 한번 그 곳에 찾아가서 곰소의 상황을 살펴보고, 미수의 옛 향기를 맡고 싶다. 곰소가 낚시하기에 어떤 상황인지 살펴보면, 미수가 어떤 낚시를 했는지 일말의 단서가 잡힐지도 모른다. 웅연범주시영숙(熊淵泛舟示永叔) 시는 미수가 71세인 을사년에 연천강에서 뱃놀이를 하고 지은 것으로 연보에 나와 있다.
어쨌든 견지낚시에 대한 옛 기록은 귀하다. 서동찬씨의 글에 대해 의문이 나는 점은 뜯어 살펴보았지만, 나 자신 미수의 낚시가 견지낚시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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